다선일미 - 법정 스님
【1】
몇해 전 덕수궁에서 한 개인이 수집한 것으로 <한국미술 특별전>이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이 그린 <오수도(午睡圖)에 반해 세 차례나 전시장을 찾아 갔었다.
그림은 한 그루 늙은 소나무 아래 초당(草堂)이 있고, 훤히 들여다 보이는
초당 안에서는 한 노옹(老翁)이 비스듬히 서책(書冊)에 기댄 채 낮잠을 즐기고 있다.
초당 곁 벼랑 아래서 동자가 다로(茶爐)에 부채질을 하다 말고 노송 아래서
졸고 있는 한 쌍의 학을 돌아보고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때 그 그림의 분위기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토록 뻔질나게 덕수궁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처인 강 건너 다래헌(茶來軒)으로 돌아와서는,
샘물을 길어다 그 <오수도>의 분위기를 연상하면서 혼자서 달여 마시곤 했었다.
그후 그 그림이 우표로 발행되자 나는 한꺼번에 백 장이나 사두고 쓰기도 했었다.
전통적인 우리 동양의 산수화를 보면 두서너 노인들이 바위와 나무와 물과 폭포가
있는 산천경개를 한가히 즐기고 있고, 한 곁에는 으례 차 시중을 드는 동자가 있게 마련.
이것은 예전부터 풍류와 더불어 차가 우리네 생활의 한 부분임을 가리키고 있는 증거다.
근래에 와서 차(茶)라고 하면 곧 커피를 연상할 만큼 우리네 기호도 양코배기들 쪽으로 근대화해버렸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네 고유의 엽차(葉茶) 혹은 녹차(綠茶)를 가리킨다.
선승(禪僧)들 사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 차를 항시 마시고 있어 별로 자랑거리가 될 것도 없지만,
최근 일반이 차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먼저 밝혀 둘 것은 차 마시는 일이 결코 사치나 귀족 취미에서가 아니고 생활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람이 일반 동물과 다른 것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먹는 일이 빈 밥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미각을 통해 정신적으로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삼으려는 취향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육신의 건강에는 분명히 해로운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즐겨
마시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차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생활 가운데서 만약 이런 기호품이 없었다면
예측할 수 없도록 우리들의 안뜰은 삭막하고 어두워졌을 것이다.
술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취하게 하는데, 차는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한다.
차의 고전(古典)인 육우(陸雨. ?∼804)의 <다경(茶經)>에 『울분을 삭이는 데는 술을 마시고,
혼미(昏迷)를 씻는데는 차를 마신다』고 지적했듯이, 술이 시끄러운 집합을 위해 발명된 것이라면,
차는 한적한 모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술은 아무데서나
아무하고도 마실 수 있지만 차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마시는 그 분위기와 이웃을 가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임어당(林語堂)은 그의 <다론(茶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차의 성질 중에는 우리들을 한가하고 고요한 인생의 명상에로 이끄는 힘이 있다.
어린애들이 울고 있는 곳에서 차를 마신다거나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나 정치를 논하는 무리들과 더불어 차를 마신다는 것은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 차를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차의 성질 자체가 맑고 향기로운 것이므로 비오거나흐린 날에는 제맛이 나지 않을 뿐더러 그 분위기가 적합하지 않다.
차는 고도로 승화된 미의식(美意識)의 세계다. 그러므로 먼저 그 분위기와 조건이 가려져야 한다.
흔히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화경청적(和敬淸寂)을 들고 있다. >화평하고 예절있고 맑고 고요한 분위기여야 한다는 것.
따라서 차맛을 진짜로 알게 되면 『화경청적』의 덕이 곧 그 사람의 인품으로까지 배이게 될 것이다.
차를 즐겨 드는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지만 함께 마시는
사람의 수가 적어야 차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객(客)이 많으면 시끄러워지고 차의 은은한 매력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도 그의 <동다송(東茶頌)>에서 밝히고 있다.
『차를 마시는 법은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아늑한 정취가 없어진다.
홀로 마시면 신묘하고, 둘이서 마시면 좋고, 서넛이 마시면 유쾌하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고, 칠팔인이 마시면 나눠먹이와 같다』
나는 남에게 무얼 주고 나서 후회한 적이 별로 없는데(그렇게 기억이 되는데),
재작년 늦가을 어느날 아는 친지들에 섞여 내 암자를 찾아온 한때의
나그네들에게 다로에 숯불까지 피워 차를 달여 주고 나서 며칠을 두고 짠하게 생각한 일이 있다.
한두 사람을 제하고는 차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눠먹이와 같다는 표현으로는 미진할 만큼 주고 나서도 못내 짠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차를 마시기 전에 코로 씽씽 냄새를 맡는가 하면, 입맛을 쩝쩝 다시지 않나,
꿀꺽꿀꺽 소리내어 마시지 않나, 후후 불면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내놓을 거라고는 차밖에 없었으므로 차를 달인 것이지만,
화경청적이 없는 그런 자리에 차를 내놓은 것부터가 주인의 불찰임을 못내 후회했었다.
일본인들처럼 차보다도 오히려 그 격식을 위한 것 같은 번거롭고 까다로운 범절(凡節)을 차릴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차를 마시는 데 있어서 최소한 기본적인 예절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홀로 거처하기 때문에 혼자서 차를 마실 때가 많다.
혼자서 드는 차를 신묘(神)하다고 했지만, 그 심경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선(禪)의 삼매(三昧)에서 느낄수 있는 선열(禪悅), 바로 그것에나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육우(陸雨)는 <다경>에서 말한다.
『깊은 밤 산중의 한간 집에 앉아 샘물로 차를 달인다.
불이 물을 데우기 시작하면 다로(茶爐)에서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찻잔에 차를 따른다.
부드럽게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둘레의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런 때의 기쁨은 도저히 속인들과 나눌 수 없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이 글은 추사(秋史)가 즐겨 읊던 다시(茶詩)다. 서투른 솜씨로 옮기면 다음과 이렇다.
조용히 앉아서
반쯤 차를 달이니 향기가 비로소 들리고
일어서 움직이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아마 이 시의 경우는 잎으로 된 녹차가 아니고 다로에 넣어서 달인 단다(單茶)나 전다(錢茶)의 경우를 말한 듯 싶다.)
【3】
지난 봄 볼일이 생겨 오랜만에 서울에 갔었다.
서울이란 도시가 원래 그런 곳이긴 하지만 마음이 영 붙질 않았다.
노상 엉거주춤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차를 마시지 않았더니
속이 컬컬하고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마침 한 스님한테서 차를 조금 얻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마땅한 다구(茶具)가 없어 차를 마실 수 없었다.
커피 포트 같은 데다 차를 우리고 따라 먹을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사치스런 생각에서가 아니다. 차의 은은한 향취와 맑은 빛깔과
그 미묘한 맛을 알려면 다구가 갖추어져야 한다.
최소한 도자기로 된 차관(茶罐)과 잔만은 갖추어야 차를 제대로 우려서 마실 수가 있다.
사무실 스님의 배려로 인사동에 들러 요즘 이천 주변에서 구워낸 차관과 찻잔을 한 벌 구하긴 했지만,
정이 가지 않는 그릇들이라 끝내 차맛을 낼 수가 없었다. 다구는 길이 들어야 한다.
다인(茶人)들이 다구를 중히 여기는 것은 멋을 부리거나 도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차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값이 비싸다고 해서 좋은 그릇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값이 헐하더라도 다실(茶室)의 격에 어울리면 차맛을 낼 수 있다.
찻잔은 될수록 흰 것이 좋다. 빛깔을 함께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끓인 물을 부어 차를 우리는 차관은 차를 따를 때 물이 똑똑 끊어져야 하는데,
그 처리가 잘 안되어 차를 바닥에 흘리게 되면 차맛은 반감되고 만다.
다음으로 질이 좋은 물이 문제다. 수도물은 소독약(표백제) 냄새 때문에 차맛을 제대로 내기가 어렵다.
더구나 요즘처럼 오염된 대도시의 수도물로는 차가 지니고 있는 그 섬세한 향기와 맛을 알기 어렵다.
산중의 샘물이 그중 좋은 물인 줄은 알지만,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으니 수도물을 가정에서 여과해서 쓸 수 밖에 없다.
다실의 분위기와 다구와 물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정성들여 달이는(혹은 우리는)
법을 모르면 또한 차맛을 제대로 낼 수 없다. 차를 너무 우리면 그 맛이 쓰고 덜 우리면 싱겁다. 알맞게 우리어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갖춰 내어야 온전한 차맛이 난다.
초의선사는 다시 말한다.
『물과 찻감이 완전할지라도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얻지 못하면 안된다.
중정의 도란 차의 신기로운 기운과 물의 성질이 어울려서 가장 원만하게 배합된 상태를 말한다』
차를 우리는 법은 실지로 해보고 스스로 터득해야지 말만으로는 그 요체(要諦)를 이해하기 어렵다.
새로 길어온 물을 펄펄 끓여 차관과 찻잔을 먼저 가셔낸다.
끓은 물을 70도쯤으로 식힌 다음, 차를 알맞게 차관에 넣어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아 다시 1분쯤 우려 찻잔을 따라서 마신다.
설명은 차례대로 했지만 그 요령은 눈이나 손으로만 익히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느끼고 증험(證驗)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선(禪)이나 도(道)의 경지와 같은 것.
차의 맛을 보면 곧 차를 만든 사람의 심정까지도 맛볼 수 있다.
좋은 차는 색(色).향(香).미(味)가 갖추어져야 한다. 차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이라면 빛과 향기와 맛도 온전히 갖추어진 것이다.
녹황색(綠黃色)이 돌고 맑고 은은한 향기와 담백하고 청초한 맛이 나는 것이 좋은 차다.
차는 식물(植物) 중에서도 가장 맑은 식물이다. 차의 그토록 오묘한 빛과 향기와 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밤의 별빛과 맑은 바람과 이슬, 그리고 안개 구름 햇볕 눈 비......
이런 자연의 맑디맑은 정기가 한데 엉겨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처럼 미묘한 빛과 향기와 맛이 나는 것이다.
임어당의 말을 더 들어보자.
『차는 고결한 은자(隱者)와 결합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차는 청순(淸純)의 상징이다.
차를 따서 불에 쪼여 만들고, 보관하고, 마지막으로 차를 달여 마시기까지 청결이 가장 까다롭게 요구된다.
기름기있는 손이나 찻잔이 조금이라도 차잎에 닿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노고는 순식간에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만다.
따라서 차를 즐기려면 모든 허식이나 사치스러운 유혹이 눈과 마음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 분위기라야만 한다』
【4】
선승(禪僧)들이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은 항시 맑은 정신을 지니려는 약리적(藥理的)인 뜻도 없지 않지만,
그들의 생태가 차가 지니고 있는 그 담백하고 투명한 맛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온갖 겉치레를 훨훨 벗어버리고 솔직하고 단순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은 무일물(無一物)의 경지에서 비로소 진미(眞味)와 진향(眞香)과 진색(眞色)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조주선사(趙州禪師)가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한결같이 차를 내놓으면서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다.
선가(禪家)에는 차를 소재로 한 선문답(禪問答)이 많다. 협산(夾山)선사가
어느날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한 제자가 찾아왔다. 『그대도 한잔 하지』라고 말하니 제자는 다로 곁에 앉는다. 선사는 손수 차를 따라 내놓는다.
제자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려고 할 때 선사는 급히 찻잔을 당기면서
『이것이 무엇이지?』라고 큰소리로 묻는다. 제자는 어리둥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만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한잔의 차다.
그러나 차이면서도 그것은 차가 아니다. 이 한 잔의 차야말로 하늘과 땅을 꿰뚫고,
주인과 나그네를 꿰뚫고 어리석음과 깨달음을 꿰뚫은 본지풍광(本地風光)이어야 한다.
방 거사(龐居士)는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인 신도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인 동시에 선(禪)에도 조예가 깊었다. 원래는 소문난 부자였는데,
느낀 바 있어 어느날 그의 전재산을 몽땅 물속에 던져버리고 청빈한 생활로 돌아간다.
이 방 거사가 그 당시에 이름난 마조선사(馬祖禪師)를 찾아가 물었다.
『온갖 법과 짝하지 않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입에 죄다 마셔버린다면 일러주겠노라』
방 거사는 마조선사의 이 말끝에 크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온 강물을 한입에 마셔버리는 그런 심정이 아니고는 진정한 차맛을 알 수 없다.
어디 강물뿐인가.
온 세상을 통째로 마셔버려야 비로소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다선일미(茶禪一味)요 또한 선가의 차 마시는 법이다.
【1】
몇해 전 덕수궁에서 한 개인이 수집한 것으로 <한국미술 특별전>이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이 그린 <오수도(午睡圖)에 반해 세 차례나 전시장을 찾아 갔었다.
그림은 한 그루 늙은 소나무 아래 초당(草堂)이 있고, 훤히 들여다 보이는
초당 안에서는 한 노옹(老翁)이 비스듬히 서책(書冊)에 기댄 채 낮잠을 즐기고 있다.
초당 곁 벼랑 아래서 동자가 다로(茶爐)에 부채질을 하다 말고 노송 아래서
졸고 있는 한 쌍의 학을 돌아보고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때 그 그림의 분위기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토록 뻔질나게 덕수궁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처인 강 건너 다래헌(茶來軒)으로 돌아와서는,
샘물을 길어다 그 <오수도>의 분위기를 연상하면서 혼자서 달여 마시곤 했었다.
그후 그 그림이 우표로 발행되자 나는 한꺼번에 백 장이나 사두고 쓰기도 했었다.
전통적인 우리 동양의 산수화를 보면 두서너 노인들이 바위와 나무와 물과 폭포가
있는 산천경개를 한가히 즐기고 있고, 한 곁에는 으례 차 시중을 드는 동자가 있게 마련.
이것은 예전부터 풍류와 더불어 차가 우리네 생활의 한 부분임을 가리키고 있는 증거다.
근래에 와서 차(茶)라고 하면 곧 커피를 연상할 만큼 우리네 기호도 양코배기들 쪽으로 근대화해버렸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네 고유의 엽차(葉茶) 혹은 녹차(綠茶)를 가리킨다.
선승(禪僧)들 사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 차를 항시 마시고 있어 별로 자랑거리가 될 것도 없지만,
최근 일반이 차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먼저 밝혀 둘 것은 차 마시는 일이 결코 사치나 귀족 취미에서가 아니고 생활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람이 일반 동물과 다른 것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먹는 일이 빈 밥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미각을 통해 정신적으로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삼으려는 취향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육신의 건강에는 분명히 해로운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즐겨
마시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차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생활 가운데서 만약 이런 기호품이 없었다면
예측할 수 없도록 우리들의 안뜰은 삭막하고 어두워졌을 것이다.
술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취하게 하는데, 차는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한다.
차의 고전(古典)인 육우(陸雨. ?∼804)의 <다경(茶經)>에 『울분을 삭이는 데는 술을 마시고,
혼미(昏迷)를 씻는데는 차를 마신다』고 지적했듯이, 술이 시끄러운 집합을 위해 발명된 것이라면,
차는 한적한 모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술은 아무데서나
아무하고도 마실 수 있지만 차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마시는 그 분위기와 이웃을 가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임어당(林語堂)은 그의 <다론(茶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차의 성질 중에는 우리들을 한가하고 고요한 인생의 명상에로 이끄는 힘이 있다.
어린애들이 울고 있는 곳에서 차를 마신다거나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나 정치를 논하는 무리들과 더불어 차를 마신다는 것은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 차를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차의 성질 자체가 맑고 향기로운 것이므로 비오거나흐린 날에는 제맛이 나지 않을 뿐더러 그 분위기가 적합하지 않다.
차는 고도로 승화된 미의식(美意識)의 세계다. 그러므로 먼저 그 분위기와 조건이 가려져야 한다.
흔히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화경청적(和敬淸寂)을 들고 있다. >화평하고 예절있고 맑고 고요한 분위기여야 한다는 것.
따라서 차맛을 진짜로 알게 되면 『화경청적』의 덕이 곧 그 사람의 인품으로까지 배이게 될 것이다.
차를 즐겨 드는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지만 함께 마시는
사람의 수가 적어야 차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객(客)이 많으면 시끄러워지고 차의 은은한 매력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도 그의 <동다송(東茶頌)>에서 밝히고 있다.
『차를 마시는 법은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아늑한 정취가 없어진다.
홀로 마시면 신묘하고, 둘이서 마시면 좋고, 서넛이 마시면 유쾌하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고, 칠팔인이 마시면 나눠먹이와 같다』
나는 남에게 무얼 주고 나서 후회한 적이 별로 없는데(그렇게 기억이 되는데),
재작년 늦가을 어느날 아는 친지들에 섞여 내 암자를 찾아온 한때의
나그네들에게 다로에 숯불까지 피워 차를 달여 주고 나서 며칠을 두고 짠하게 생각한 일이 있다.
한두 사람을 제하고는 차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눠먹이와 같다는 표현으로는 미진할 만큼 주고 나서도 못내 짠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차를 마시기 전에 코로 씽씽 냄새를 맡는가 하면, 입맛을 쩝쩝 다시지 않나,
꿀꺽꿀꺽 소리내어 마시지 않나, 후후 불면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내놓을 거라고는 차밖에 없었으므로 차를 달인 것이지만,
화경청적이 없는 그런 자리에 차를 내놓은 것부터가 주인의 불찰임을 못내 후회했었다.
일본인들처럼 차보다도 오히려 그 격식을 위한 것 같은 번거롭고 까다로운 범절(凡節)을 차릴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차를 마시는 데 있어서 최소한 기본적인 예절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홀로 거처하기 때문에 혼자서 차를 마실 때가 많다.
혼자서 드는 차를 신묘(神)하다고 했지만, 그 심경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선(禪)의 삼매(三昧)에서 느낄수 있는 선열(禪悅), 바로 그것에나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육우(陸雨)는 <다경>에서 말한다.
『깊은 밤 산중의 한간 집에 앉아 샘물로 차를 달인다.
불이 물을 데우기 시작하면 다로(茶爐)에서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찻잔에 차를 따른다.
부드럽게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둘레의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런 때의 기쁨은 도저히 속인들과 나눌 수 없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이 글은 추사(秋史)가 즐겨 읊던 다시(茶詩)다. 서투른 솜씨로 옮기면 다음과 이렇다.
조용히 앉아서
반쯤 차를 달이니 향기가 비로소 들리고
일어서 움직이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아마 이 시의 경우는 잎으로 된 녹차가 아니고 다로에 넣어서 달인 단다(單茶)나 전다(錢茶)의 경우를 말한 듯 싶다.)
【3】
지난 봄 볼일이 생겨 오랜만에 서울에 갔었다.
서울이란 도시가 원래 그런 곳이긴 하지만 마음이 영 붙질 않았다.
노상 엉거주춤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차를 마시지 않았더니
속이 컬컬하고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마침 한 스님한테서 차를 조금 얻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마땅한 다구(茶具)가 없어 차를 마실 수 없었다.
커피 포트 같은 데다 차를 우리고 따라 먹을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사치스런 생각에서가 아니다. 차의 은은한 향취와 맑은 빛깔과
그 미묘한 맛을 알려면 다구가 갖추어져야 한다.
최소한 도자기로 된 차관(茶罐)과 잔만은 갖추어야 차를 제대로 우려서 마실 수가 있다.
사무실 스님의 배려로 인사동에 들러 요즘 이천 주변에서 구워낸 차관과 찻잔을 한 벌 구하긴 했지만,
정이 가지 않는 그릇들이라 끝내 차맛을 낼 수가 없었다. 다구는 길이 들어야 한다.
다인(茶人)들이 다구를 중히 여기는 것은 멋을 부리거나 도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차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값이 비싸다고 해서 좋은 그릇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값이 헐하더라도 다실(茶室)의 격에 어울리면 차맛을 낼 수 있다.
찻잔은 될수록 흰 것이 좋다. 빛깔을 함께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끓인 물을 부어 차를 우리는 차관은 차를 따를 때 물이 똑똑 끊어져야 하는데,
그 처리가 잘 안되어 차를 바닥에 흘리게 되면 차맛은 반감되고 만다.
다음으로 질이 좋은 물이 문제다. 수도물은 소독약(표백제) 냄새 때문에 차맛을 제대로 내기가 어렵다.
더구나 요즘처럼 오염된 대도시의 수도물로는 차가 지니고 있는 그 섬세한 향기와 맛을 알기 어렵다.
산중의 샘물이 그중 좋은 물인 줄은 알지만,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으니 수도물을 가정에서 여과해서 쓸 수 밖에 없다.
다실의 분위기와 다구와 물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정성들여 달이는(혹은 우리는)
법을 모르면 또한 차맛을 제대로 낼 수 없다. 차를 너무 우리면 그 맛이 쓰고 덜 우리면 싱겁다. 알맞게 우리어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갖춰 내어야 온전한 차맛이 난다.
초의선사는 다시 말한다.
『물과 찻감이 완전할지라도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얻지 못하면 안된다.
중정의 도란 차의 신기로운 기운과 물의 성질이 어울려서 가장 원만하게 배합된 상태를 말한다』
차를 우리는 법은 실지로 해보고 스스로 터득해야지 말만으로는 그 요체(要諦)를 이해하기 어렵다.
새로 길어온 물을 펄펄 끓여 차관과 찻잔을 먼저 가셔낸다.
끓은 물을 70도쯤으로 식힌 다음, 차를 알맞게 차관에 넣어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아 다시 1분쯤 우려 찻잔을 따라서 마신다.
설명은 차례대로 했지만 그 요령은 눈이나 손으로만 익히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느끼고 증험(證驗)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선(禪)이나 도(道)의 경지와 같은 것.
차의 맛을 보면 곧 차를 만든 사람의 심정까지도 맛볼 수 있다.
좋은 차는 색(色).향(香).미(味)가 갖추어져야 한다. 차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이라면 빛과 향기와 맛도 온전히 갖추어진 것이다.
녹황색(綠黃色)이 돌고 맑고 은은한 향기와 담백하고 청초한 맛이 나는 것이 좋은 차다.
차는 식물(植物) 중에서도 가장 맑은 식물이다. 차의 그토록 오묘한 빛과 향기와 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밤의 별빛과 맑은 바람과 이슬, 그리고 안개 구름 햇볕 눈 비......
이런 자연의 맑디맑은 정기가 한데 엉겨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처럼 미묘한 빛과 향기와 맛이 나는 것이다.
임어당의 말을 더 들어보자.
『차는 고결한 은자(隱者)와 결합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차는 청순(淸純)의 상징이다.
차를 따서 불에 쪼여 만들고, 보관하고, 마지막으로 차를 달여 마시기까지 청결이 가장 까다롭게 요구된다.
기름기있는 손이나 찻잔이 조금이라도 차잎에 닿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노고는 순식간에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만다.
따라서 차를 즐기려면 모든 허식이나 사치스러운 유혹이 눈과 마음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 분위기라야만 한다』
【4】
선승(禪僧)들이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은 항시 맑은 정신을 지니려는 약리적(藥理的)인 뜻도 없지 않지만,
그들의 생태가 차가 지니고 있는 그 담백하고 투명한 맛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온갖 겉치레를 훨훨 벗어버리고 솔직하고 단순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은 무일물(無一物)의 경지에서 비로소 진미(眞味)와 진향(眞香)과 진색(眞色)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조주선사(趙州禪師)가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한결같이 차를 내놓으면서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다.
선가(禪家)에는 차를 소재로 한 선문답(禪問答)이 많다. 협산(夾山)선사가
어느날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한 제자가 찾아왔다. 『그대도 한잔 하지』라고 말하니 제자는 다로 곁에 앉는다. 선사는 손수 차를 따라 내놓는다.
제자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려고 할 때 선사는 급히 찻잔을 당기면서
『이것이 무엇이지?』라고 큰소리로 묻는다. 제자는 어리둥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만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한잔의 차다.
그러나 차이면서도 그것은 차가 아니다. 이 한 잔의 차야말로 하늘과 땅을 꿰뚫고,
주인과 나그네를 꿰뚫고 어리석음과 깨달음을 꿰뚫은 본지풍광(本地風光)이어야 한다.
방 거사(龐居士)는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인 신도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인 동시에 선(禪)에도 조예가 깊었다. 원래는 소문난 부자였는데,
느낀 바 있어 어느날 그의 전재산을 몽땅 물속에 던져버리고 청빈한 생활로 돌아간다.
이 방 거사가 그 당시에 이름난 마조선사(馬祖禪師)를 찾아가 물었다.
『온갖 법과 짝하지 않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입에 죄다 마셔버린다면 일러주겠노라』
방 거사는 마조선사의 이 말끝에 크게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온 강물을 한입에 마셔버리는 그런 심정이 아니고는 진정한 차맛을 알 수 없다.
어디 강물뿐인가.
온 세상을 통째로 마셔버려야 비로소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다선일미(茶禪一味)요 또한 선가의 차 마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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