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January 2008

무소유 (34) 나의 애송시


나의 애송시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청마靑馬 유치환의 <심산深山>이라는 시다. 시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내 생활의 영역에 물기와 탄력을 주는 이런 언어의 결정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말년을 어떻게 보낼까를 생각했다. 새파란 주제에 벌써부터 말년의 일이냐고 탓할지 모르지만, 순간에서 영원을 살려는 것이 생명 현상이다. 어떤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재를 풍성하게 가꾸어 주는 수가 있다. 심산은 내게 상상의 날개를 주어 구만리 장천을 날게 한다.


할 일 좀 해놓고 나서는 세간적인 탈을 훨훨 벗어버리고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홀가분하게 정말 알짜로 살고 싶다.


언젠가 서투른 붓글씨로 심산을 써서 머리맡에 붙여 놓았더니 한 벗이 그걸 보고, 왜 하필이면 궁상맞게 이를 잡느냐는 것이었다. 할 일이 없으니 양지 바른 바위에 앉아 이나 잡을밖에 있느냐고 했지만, 그런 경지에서 과연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불가에서는 조그마한 미물이라도 살생을 금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저쪽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니까.


각설, 주리면 가지 끝에 열매나 따 먹고 곤하면 바위 아래 풀집에서 잠이 든다.


새삼스레 더 배우고 익힐 것도 없다. 더러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안개에 가린 하계를 굽어본다.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 다로茶爐 곁에서 사슴이 한 쌍 졸고 있다. 흥이 나면 노래나 읊을까? 낭랑한 노랫소리를 들으면 학이 내려와 너울너울 춤을 추리라.


인적이 미치지 않는 심산에서는 거울이 소용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 테니까.


일력日曆도 필요 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아,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산울림 영감처럼 살고 싶네.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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