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January 2008

무소유 (32) 진리는 하나인데 - 기독교와 불교


진리는 하나인데 - 기독교와 불교


1

이태 전 겨울, 서대문에 있는 다락방에서 베다니 학원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연사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대개가 목사의 부인되는 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강연을 하면서도 이상한 착각에 속으로 갸웃거렸다.


여러 청중 속에 대여섯 사람쯤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꼭 만난 사람들 같은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주관하던 법회였는지, 아니면 출가 이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분이었든지, 어디서 본 얼굴들 같은데 도무지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문득 그 얼굴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얼굴들은 실제로 어디서 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이 밖으로 번져 나옴으로 해서, 기왕에 알았던 사람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전생에 이웃에서 살던 사촌들이었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사람끼리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밖에 드러난 거죽에서보다도 투명한 영혼에 의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는 뒷날 또 만나게 된다. 한 번 만난 사람들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 해 가을 나는 운수행각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해질 녘 속리산에 들르게 되었다. 객실에 행장을 푼 뒤 개울가에 나가 먼지를 털고 오는데


"법정 스님 아니세요?"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때 베다니에서 만난 어머니들이었다. 뜻 아닌 데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언젠가 붉은 줄을 그어 가며 읽던 막스 밀러의 글이 생각났다.


"......사방이 어두워졌을 때, 마음 속 깊이 혼자임을 느꼈을 때, 그리고 사람들이 좌로 우로 지나가면서도 서로가 누구인지 모를 때, 잊었던 감정이 우리 가슴 속에서 용솟음쳐 오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우정은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저를 모르셔요?' 하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한 때에 인간과 인간의 사이는 형제의 사이보다도, 부자지간보다도, 친구지간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때 타인은 결코 무연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의 분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가 아무 말도 없이 스쳐 지나가고 만다.


2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를 통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에 비해 대인 관계에 있어서 너그럽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인 관계가 이교도로 향하게 될 때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수가 더러 있다. 너그러웠던 아량이 갑자기 움츠러들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우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대접을 받는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은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 물론 얻으러 온 탁발승으로 오인하고 한 말일 것이다. 태연하게 물건을 골라 돈을 치르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복잡한 표정이다. 혹은 기독교인들끼리 산사에 놀러와 어쩌다 찬송가라도 부를라치면 기를 쓰고 제지하는 산승들이 또한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씁쓸한 현상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라기보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 드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고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맹목에서일 것이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마치 자기의 신심을 두텁게 하는 일인 양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견短見들이 읽는 경전이나 성경의 해석 또한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글이나 말 뒤에 들어 있는 뜻을 망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표면적인 언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종교든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상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맹목적인 숭배물로 되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질 수 있다. 그런데 그릇된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은 성급하게도 인식을 거치지 않고 비판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인식이 없는 비판이란 건전한 비판일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타종교의 본질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전까지 기독교와 불교도 사이에 바람직한 대화의 길이 트이지 못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상호간에 독선적인 아집으로 인한 오해에 있었을 것이다.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오늘날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릇된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으르렁대는 사이비 신자들과는 촌수가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의기가 상통한 그들은 구태여 입을 벌려 수인사를 나눌 것도 없이 서로가 잔잔한 미소로써 대할 것만 같다. 그들의 시야는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3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다.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가 형제임을 마음 속으로부터 느끼게 된다. 최근에 종교인들끼리의 모임이 활발해지면서부터는 종래 편견에 사로잡힌 이해 이전의 상태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소중하다. 만나지 않고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또한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남은 일종의 개안開眼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 이야기함으로써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인식의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영역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외롭게 떠 있는 섬이 아니라, 같은 대지에 맺어져 있는 불가분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리그 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이 빈 마음으로 대장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그릇된 고정 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데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는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4장 12절)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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