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January 2008

무소유 (14) 회심기


회심기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한도인閑道人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서 부침하는 중생이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 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3년 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境內地가 종단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함께 살던 주지 스님도 다른 절을 맡아서 가고, 그 그늘에서 붙어살던 나는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른 도량으로 옮겨 차라리 눈으로 보지나 말자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 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 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지게 되었다. 내가 주지 노릇을 하지 않고 붙어 살 바에야 어디로 옮겨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중생들끼리 얽혀 사는 사바세계라면 거기가 거기지. 그렇다면 내 마음먹기 탓이다. 차라리 비리의 현장에서 나를 키우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 않더냐.


이때부터 팔려 나간 땅에 대해서도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사찰 소유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도들이 희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땅을 절에서 차지한 것일 게다. 그러다가 그 인연이 다해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내지가 팔렸다고 해서 그 땅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다만 소유주가 바뀔 뿐이다.


이날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불도저며 바위를 뚫는 컴프레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을 향해서는 곧잘 베풀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나 자신은 무엇을 얼마나 베풀어 왔느냐. 지금 저 소리는 너의 잠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 터를 닦는 소리다. 이 소리도 못 듣겠다는 게냐?


그리고 그 일터에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밤잠도 못 자며 땀 흘려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몇 사람씩 딸린 부양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들 가족 중에는 지금 입원 환자도 있을 거고, 등록금을 내야 할 학생도 있을 것이다. 연탄도 들여야 하고, 눈이 내리기 전에 김장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 주지는 못할 망정 살기 위해 일하는 소리조차 듣기 싫다는 게냐?


이처럼 생각이 돌이켜지자 그토록 골이 아프던 소음이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이때를 고비로 나는 종래까지의 사고와 가치 의식이 아주 달라졌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소유 관념이나 손해에 대한 개념도 자연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손해란 있을 수 없다. 또 손해가 이 세상 어느 누군가에겐 이익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잃은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절에도 가끔 도둑이 들어온다. 절이라고 이 지상의 풍속권에서 예외는 아니다. 주기적으로 기웃거리는 단골 도둑이 있어 허술한 문단속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날마다 소용되는 물건을 몽땅 잃었을 때 괘씸하고 서운한 생각이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러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한동안 맡아 가지고 있던 걸 돌려보낸 거라고.


자칫했더라면 물건 잃고 마음까지 잃을 뻔하다가 공수레 공수거空手來 空手去의 교훈이 내 마음을 지켜 주었던 것이다.


대중 가요의 가사를 빌릴 것도 없이, 내 마음 나도 모를 때가 없지 않다.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이라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화나는 그 불꽃 속에서 벗어나려면 외부와의 접촉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그보다 생각을 돌이키는 일상적인 훈련이 앞서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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